돌아보니 내가 우리 차문화에 직접 관여한 지도 어언 20개 성상이 훨씬 넘었다. 짧지 않은 세월이면서도 짧게만 느껴지는 시간들이다. 나에게 차는 분명 매력 있는 새로운 세계였고, 그 흡인력은 나를 놓아주질 않았다. 책을 들면 자정을 훨씬 넘겨도 놓고 싶지 않았고, 글을 쓰면 밤을 새워도 피로하지 않았다. 그런 힘은 모두 차에서 나온 것이다. 찻잔 속에는 하늘과 땅이 만나고, 자연과 내가 얘기하며, 만들어 보낸 이의 영혼과 내 육신이 함께한다. 나에게 차는 다정한 벗이고 손 앞에 놓아두는 애완물이다. 만든 사람과 보낸 이의 정성이 배어 있는 소중한 선물이다. 정성을 다해 만들지 않은 차는 차가 아니고 상품일 뿐이다. 영혼이 들어있지 않은 예술품과 같다.
문화란 한 시대의 응축(凝縮)된 결과물이자 결정체(結晶體)다. 곧 사상과 기호, 그리고 그 시대인들의 호기심이 성숙(成熟)되어 서 핀 아름다운 꽃이다. 차문화도 그 중의 하나다.
푸른 솔 내 집에 고운 사람 와서
좋은 차 우리니 자연의 주악(奏樂樂) 소리
귀 밝고 눈 맑아져 먼 산이 다가오네
찻잔을 앞에 하면 그리운 얼굴들이 옆에 있고, 반 넘어 익은 차향은 처음처럼 한결같아[茶半熟 香初泛], 심혼이 상연(爽然)하여 시공의 제약에서 벗어난다.
찻자리의 묘(妙)는 한가로운 속에 유연하게 진행되거나, 연어(軟語)로 심금을 터서, 서로의 생각들이 끝없이 넘나드는 몰아(沒我)의 드높은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원래 차는 분위기에 어울리는 자리에서, 차와 친숙한 이가, 능숙한 솜씨로, 좋은 물을 길어, 어울리는 그릇에, 정성껏 우려, 한가롭게 마셔야 격에 어울린다. 어느 민족이든 유구한 역사 속에는 그들이 오랫동안 간직하여 몸에 밴 생활문화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가 내포되어 있다. 그런 생활문화 중에도 음다문화는 여러 부면으로 연관 지어지는 중심에 놓여있기 때문에 정신문화사의 벼리[綱]가 되고 인문학에서도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분야가 된다.
차를 마시는 것은 독서를 하는 것과도 상통한다. 글자 한 자 한 자, 문장 하나하나에 스민 깊은 뜻을 한 겹 한 겹 벗기면서 읽는 것이, 차를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면서 깨닫는 것과 같다. 차는 소박함 속에 무한의 다양성을 구비하고 있다. 흡사 우리 고가(古家)들이 구조가 단순간결하고 색채나 장식이 검소하고 단조로운 것이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비워진 마음을 뜻하는 것과 한 가지다. 그 빈 마음은 어떤 것이라도 수용할 수 있는 현허(玄虛)한 세계다.
_ 〈책머리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