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은 꿈꾼다. 가보지 않은 세상은 그대로 꿈 덩어리다. 그래서 특별한 것은 항상 공상 속에 있다. 젊다고 아픔이 없는 건 아니다. 현실은 늘 차다. 그럴수록 잡히지 않는 그곳은 더욱 특별하다.
늙음은 짓궂다. 사납다. 누릴 것 다 누려 보고도 아쉬움만 더 한다. 세상을 달관한 듯하면서도 욕망으로 부푼 고무풍선에 귀를 쫑긋 세운다. 풍선을 터뜨릴 뾰족함을 버리지 못한다. ‘세월 무상하다’ 객관적 평면에 나를 올려놓고 담담한 체하지만 젊음이 너무 부럽다. 늙음한테 젊음은 지나온 세월이 아니라, 가지지 못하는 시간이다. -본문 33쪽-
『반야심경』에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마음에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으며 두려움이 없으니, 뒤바뀐 몽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에 든다 하였다. 걸림 없음. ‘절대’로 고정하는 ‘상’을 가지지 않음이다. -중략-
‘부처’라는 언어를 벗어난다면. 부처의 눈물은 뜨겁다. 왜구에게 칼을 높이 치켜든 서산대사, 피를 튀기는 시뻘건 칼춤은 인연 줄을 품는 자비의 화신이다. 분노로 일그러질지언정 사랑과 연민으로 끓는다. 인연은 부처를 악마로, 악마를 천사로 만들기도 한다. 부처의 중요한 가르침인 비폭력은 존중되어야 한다. -본문 209쪽-
‘중생이라 하는 것은 중생 아님을 말함이니,’ 헐벗고 천대받는 민중을 외면하고, 마음 어디를 뒤적거려 부처를 얻겠단 말인가?
굶주리고 멸시받는 그들이 부처임을 안다면…… 그럼에도 불법이 이어져 온 것을 보면 기적이다 할 만하다. 탐욕으로 혼탁한 세상을 밝힐 등불로 간화선이 제격인가? 자문해 볼 일이다.
‘일체유심조’를 보자. ‘모두 마음이 짓는다. 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한다. 불법은 곧잘 마음을 거울에 비유한다. 거울은 가감없이 비춘다. 흔들리는 깃발을 마음이 드러내므로 깃발이 존재하듯, ‘일체유심조’에 따르면 세상은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양자물리학도 같은 입장이다. 보는 관찰자에 의해 시공간이 열린다. -본문 3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