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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북,불교용품,불교서적,불교사경

중화, 사라진 문명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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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상품명 중화, 사라진 문명의 기준
정가 37,900원
판매가 34,110원
저자/출판사 배우성/푸른역사
적립금 1,710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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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수 669
발행일 2024-06-29
ISBN 9791156122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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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사대주의와 선비정신을 넘어서
한국사를 읽는 또 다른 틀, ‘중화’
지금, 왜 ‘중화’를 이야기하는가
우리가 역사를 읽는 것은 과거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지금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따라 역사학은 과거의 경험을 지금 여기로 어떻게 소환할 것인가에 관심이 많다. 그 때문일까. 선비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거나, 망국적 사대주의의 잔재를 청산하여 더 주체적인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선비정신과 사대주의라는 두 단어가 썩 어울린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중 하나를 되살리고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할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눈으로 보면 사대를 말한 것은 바로 선비였다. 선비와 사대 두 단어 아래를 관통하는 공통의 심연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지은이가 지금 여기에서 중화를 다시 읽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지은이는 중화를 매개항으로 하여 그 심연의 역사를 치밀하게 독해하고, 선비정신이나 사대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의 현재적 의의를 밝혀 보려 한다.



수상내역/미디어추천

미디어 추천도서 > 주요일간지소개도서 > 국민일보 > 2024년 6월 5주 선정
미디어 추천도서 > 주요일간지소개도서 > 동아일보 > 2024년 6월 5주 선정
미디어 추천도서 > 주요일간지소개도서 > 매일경제 > 2024년 6월 5주 선정
미디어 추천도서 > 주요일간지소개도서 > 서울신문 > 2024년 6월 5주 선정
미디어 추천도서 > 주요일간지소개도서 > 조선일보 > 2024년 6월 5주 선정
미디어 추천도서 > 주요일간지소개도서 > 한겨레신문 > 2024년 6월 5주 선정
미디어 추천도서 > 주요일간지소개도서 > 한국일보 > 2024년 6월 5주 선정



저자소개
저자 : 배우성


역사학자의 이름으로 살고 있다. 오랫동안 조선 후기 역사에 관한 글을 써 왔지만, 간간이 그 시대를 벗어나는 만용을 부리기도 했다. 좀 더 긴 호흡으로 읽어 내는 역사상을 추구해 왔기 때문이다. 주로 사상과 문화를 그 시대의 문맥 위에서 묘사해 왔지만, 때로는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 시대 속 깊이 들어가 보고 싶기도 했다. 개성이 살아 있는 역사 글쓰기를 하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다. 글이 사람을 말해 주는 그런 글쓰기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모든 바람들을 담은 결과물이기도 하다. 어느 때부터인가는 장소 친화적인 역사학의 가능성에 눈을 돌리기도 했다. 장소가 무대나 용기가 아니라 시간 속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역사적 실체라고 믿기 때문이다. 2001년부터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연구하며 가르치고 있다.



목차

책머리에
왜 중화인가

서설_중화론의 시대적 변천
화이지변과 대일통의 중국사|석개와 구양수|주자와 진량|왕부지|유사배와 강유위|‘화이’와 ‘민족국가’ 구상|중심ㆍ주변의 의제와 한국사|책의 구성

1부 이적
1장 불교로 ‘이적’을 정당화하기
동해와 이역|중화와 동이|이夷와 불교|화와 이

2장 몽골을 천자국으로 여기다
상국ㆍ천자국ㆍ중국|의관과 토풍|친조와 사대|소중화와 용하변이

3장 ‘중화’가 ‘이적’과 만나 짝하다
불교와 이적|기자와 동주|수殊와 이異|향鄕ㆍ토土ㆍ방方ㆍ외外

2부 사대
1장 ‘의리’에 밝고 ‘시세’를 안다는 것
이소사대以小事大|의리와 이해利害

2장 ‘천리’와 ‘인륜’의 이름으로
천리ㆍ인륜ㆍ도통道統ㆍ정학正學|존주尊周

3장 ‘이적’ 왕조를 인정할 수 있는가
분의分義와 문文|자강自疆과 무비武備|이적과 사대|의리와 현실

3부 동국
1장 ‘동국’은 ‘중화’인가
대중화大中華|천자의 의례|유천하有天下|진어중국進於中國과 석과碩果

2장 ‘중화’를 계승한다는 것
중국中國|중국과 동국東國

3장 ‘정통’을 바로잡기
정통正統|정통과 화동華東

4부 북학
1장 ‘중국’ 다시 보기
사도斯道와 도통의 땅|대국과 시의時義

2장 친구와 배움을 찾아서
화인華人과 호로胡虜|역외춘추域外春秋와 동이

3장 오랑캐다움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북학과 좌임左袵|천의와 천도|비류匪類의 질박함ㆍ소박함|중화와 외국

5부 기자ㆍ진인ㆍ동양
1장 변경의 문인들과 ‘기자’
‘서양西洋’과 ‘외이外夷’|‘서추西醜’와 ‘기자箕子’|평안도의 의병과 의사義士

2장 반란군과 ‘진인’
진인眞人|사라진 칠의사七義士|‘당병’ㆍ‘호군’ㆍ‘호병’ㆍ‘황명’|‘효’와 ‘예’

3장 황제국에서 ‘동양’까지
‘청국’과 ‘중국’|‘제통帝統’과 ‘의주義主’|‘지나支那’와 ‘문명’|‘동국’과 ‘동양’|‘동양’과 ‘공公’

맺음말_중화, 다시 읽기
남은 문제들|지금 여기에서 ‘중화’를 읽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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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중화’와 ‘이적’, ‘중국’과 ‘이적’에 관한 중국사상의 문제의식을 찬찬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아이디어는 《예기》의 〈왕제편王制篇〉에서 시작된다(24쪽).

중화가 이적을 압도하지 못하여 이적이 중화의 영역을 넘보거나 중화 문화를 오염시키는 경우가 문제다. 이 경우 중화는 이적을 문화적으로, 영역적으로 끊어내야 한다. 그것을 ‘화이지변華夷之辨’이라 한다(25쪽).

‘중국’이라는 단어의 역사적 기원은 주나라 무왕武王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단어가 …… ‘사이’ 혹은 ‘이적’이라는 단어와 짝하기 시작한 것은 주나라 때였다. 석개의 〈중국론〉이 중요한 것은 송나라 때 ‘중국’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이 논설에서 가장 잘 정리된 형태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32쪽).

진량은 ‘중화’와 ‘이적’을 ‘천지’와 ‘천지 밖’이라는 말로 구분했다. 지리적ㆍ공간적 구분법을 받아들인 셈이다. 그러나 그 공간들은 다시 ‘정기正氣’와 ‘사기邪氣’에 의해 수식된다. ‘정기’의 땅과 ‘사기’의 땅은 또 ‘천명’과 ‘인심’, ‘예악’과 ‘의관’의 유무에 의해 구별된다. ‘중화’는 그런 유교 문화적 요소에 의해 정당화되었던 것이다(39쪽).

청나라 말기 혁명파는 서구사상을 받아들여 민족주의를 제창하는 과정에서 ‘화이지변’을 계승했다. 그것은 개혁파가 주장하는 대민족주의, 혹은 그것의 이론적 근거를 이루었던 금문학파의 대동사상과 ‘대일통’ 논의를 비판하는 것을 의미했다(45쪽).

‘중화’와 ‘이적’을 혈연ㆍ지리ㆍ문화로 정의하는 관점에 따르면, 고대 이래로 중국인은 자신을 부를 때 세 가지 계통의 단어를 사용했다. 하夏ㆍ제하諸夏ㆍ중하中夏의 갈래, 화華ㆍ중화中華ㆍ화하華夏의 갈래, 그리고 중주中州ㆍ중국中國ㆍ중원中原ㆍ중토中土의 갈래가 그것이다(50쪽).

한국사에서 ‘중화’는 언제나 중심과 주변에 관한 의제였다. ‘사대’, ‘동국東國’, ‘북학北學’ 같은 단어들이 ‘중화’와 같이 쓰였다는 사실이야말로 한국사에서 ‘중화’의 의미장이 가지는 그런 개별성을 상징한다(56쪽).

당나라 관료들의 반대도 신경이 거슬리는 대목이었다. 최치원은 관료들이 자신의 발탁을 반대한 것은 “비천한 자가 존귀한 사람을 방해하지 못하게 한 것”이며, 동시에 “이夷가 화華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려 했다”고 여겼다(70쪽).

최치원은 도교나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들을 유학과 소통시키려 한 유학자였으며, 풍류사상에 기반한 동인東人 의식의 소유자이자 보편 문명의 존재를 가정한 ‘동문同文’ 의식의 지지 자이기도 했다(71쪽).

최치원이 발해를 ‘융적’이라 하고, 신라를 “예양을 실천하는 군자국”이라 하면서도, 신라나 자신에 대해 ‘중화’나 ‘이적’ 같은 단어들을 함께 구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유학이 천자 중심의 국제질서를 정당화한다는 통념에서 보면 의외다(80쪽).

선진先秦시대에 ‘동이’는 강소성과 산동성 일대의 집단들을 부르는 명칭이었지만, 한나라 때 이후 역사서에 등장하는 ‘동이’는 대륙 동북쪽 집단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 ‘동이’가 지시하는 대상이 달라지면서 …… 한족은 피발被髮과 문신 등의 이미지로 기억하던 ‘동이’를 ‘인’하고 ’호생’하는 존재로 여기게 된 것이다(90쪽).

이제현에서 이색에 이르는 일군의 학자들이 ‘천명’을 받은 ‘성원’을 인정하는 논리는 원나라 때 허형許衡(1209~1281)의 발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허형은 ‘대일통’의 주체가 되어 ‘중국’의 문화적 전통을 수용하면 ‘중국’의 정통 왕조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103쪽).

이색은 ‘중화’를 다만 ‘변원’의 반의어로 여겼을 뿐이다. 유교만을 ‘중화’로 여기지도 않았으며, 불교를 ‘이적’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104쪽).

고려가 ‘소중화’를 말하기 시작한 것은 11세기부터였다. 1055년(문종 9) 고려는 거란에 보낸 국서에서 자국이 ‘기자의 나라’를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1102년(숙종 7)에는 평양에 기자의 사당을 세우고 그 제사를 국가의 전례 대상에 포함시켰다(119쪽).

홍무제는 ‘유송’의 계승자를 자처했으며, 고려는 몽골을 “아류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명나라와 대면해야 했다. …… 고려는 그렇게 ‘소중화’를 재발견했다. 그리고 경전상에만 전해 오던 ‘용하변이用夏變夷’를 ‘소중화’의 정체성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하기 시작했다(125쪽).

이색은 결코 원나라를 ‘원 씨’라 하지 않았으며, 명나라를 ‘의주’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이색에게도 명나라를 통해 ‘중화’의 제도를 받아들이는 일은 중요했다. ‘소중화’와 ‘용하변이’는 그런 이색의 생각을 떠받치고 있던 두 기둥이었다(129쪽).

고려는 편지를 받은 그달, 거란의 연호를 사용했으며, 그로부터 2년 뒤에는 거란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거란과의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 거란은 전쟁을 종결시키기로 하면서 ‘이소사대’라는 표현을 구사했다. 1038년(정종 4)에는 조공을 게을리하지 말 것을 고려에 요구하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소사대는 열국의 통규通規이며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모색하는 것은 제후의 격훈格訓이다.”(184쪽)

이해利害와 시비是非의 문제는 최명길이 중요하게 보는 논거 중 하나였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의 요청을 받아 종전 협상에 찬성했던 성혼成渾(1535~1598) 등의 행보에 주목했다. “일에는 시비가 있고 이해가 있으므로 일반적인 경우라면 시비, 즉 의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조정의 경우라면 사정이 다르다. 조정에 득이 된다면 그것이 곧 정의인 것이다. 여기에 강화를 하여 조정을 보존하는 것과 의를 지켜서 망하는 길이 있다. 후자는 신하로서 절개를 지키는 길이지만, 종사宗社를 보존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필부가 지켜야 할 절개와는 다른 일이다.”(192쪽)

종묘사직 지키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에서 최명길은 의심의 여지 없이 현실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종묘사직을 지킬 수만 있다면 의와 도를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식으로 발화한 적이 없다. 그의 구상은 “종묘사직을 지켜 냄으로써 의와 도를 보존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쪽에 가깝다(194쪽).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 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다. …… “생아자生我者를 위해 죽는 것이 옛 제도이니, 명나라를 위해 우리 사직이 망한다 해도 한스러울 것은 없다”는 자세를 취하는 것은 ‘의리’를 위한 선택이다. “300년 이상 이어온 사직을 하루아침에 멸망하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신하라고 칭하는 굴욕을 참아 내는 것은 ‘이해利害’를 위한 일이다(202쪽).

소국의 입장에서 이소사대를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시세와 이해를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북벌을 주장했던 송시열도 소국이 대국에 사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결코 “이해가 의리”라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다(219쪽).

이익도 대보단 제사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대보단이란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 신종의 도움이 없었으면 조선은 ‘재조’될 수 없었을 것이니, …… 명나라가 이미 멸망한 상황이지만 자손들의 입장에서는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신자臣子’의 처지도 그 자손과 다를 바 없다(246쪽).

성혼成渾도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일로는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니, 이해利害를 깊이 생각하시어 그 큰 것을 성취하셔야 합니다.” …… 필요한 것은 “의리를 밝히고 민이를 바로 세우면서 이해를 고려하는 일”이다. 달리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예의’를 지키면서 ‘자강’을 이루는 길이기도 하다(291쪽).

윤기는 조선을 더는 ‘소중화’라고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의리와 예의로 본다면 동방보다 큰 나라는 없다.” 〈동방강역〉이라는 글 첫 번째 문단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동방’ 사람들은 강역이 작은 것을 한스러워하지만, 지금 천하에서 오직 ‘동방’만이 강역이 가장 크다는 사실을 모른다(302쪽).

1779년(정조 3) 1월, 정조가 대보단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린 뒤, 무너진 데가 없는지 주변을 살폈다. 정조의 눈으로 보면, 임금이 친히 대보단에 제사 지낸다는 것은 조선이 명나라 황제들을 기억한다는 의미다. 온 세상에서 유일하게 명나라 황제를 제사 지내는 조선은 의심의 여지 없이 중화 문화의 유일한 계승자가 되는 것이다(351쪽).

정통론에 관한 이익의 견해는〈삼한정통론〉이라는 글에서 확인된다.
“동국의 역대 흥망성쇠는 대략 중화와 시작과 끝을 같이한다.” 이익은 글의 도입부에서 그렇게 말했다. ‘정통’의 내용과 흐름에 관한 한 자국사는 언제나 중국사와 한 세트임을 선언한 것이다. …… 그에 따르면, 단군은 요 임금과 같은 때 일어났으며, 주나라 무왕이 천명을 받게 되자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 기자의 팔조법금은 한나라 고조의 약법삼장約法三章과 같으며, ……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킨 때는 왕망이 전한을 찬탈한 때와 같다.〈삼한정통론〉에서 ‘동국’은 언제나 ‘중화’와 짝하는 단어였다(360쪽).

김창협에 따르면, 천하가 오랑캐의 풍속을 따른 지 오래되었지만, ‘아동我東’만은 궁벽한 모퉁이에서 의관과 예악을 바꾸지 않고 소중화로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요순과 삼왕三王이 다스 렸고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가 가르쳤던 옛 적현신주赤縣神州의 땅과 백성을 오랑캐로 여기고 더는 문헌을 찾아볼 수 없는 곳으로 본다면 그것은 지나친 것이다(396쪽).

홍양호가 1784년(정조 8) 사신이 되어 북경으로 향하는 이정운에게 글을 보냈다. …… 그에 따르면, ‘동방’은 크기가 작고 구석진 곳에 있지만, 예의를 지키고 문교를 숭상하기 때문에 중국의 사람들이 동방을 중히 여겨 왔다. 지금 천하에서 ‘중화’의 의관을 입는 곳, 읍하고 사양하는 ‘중화’의 예를 지키는 곳은 우리 ‘동방’뿐이다(402쪽).

명나라는 무엇인가, ‘중국’은 무엇이며, ‘중화’는 무엇인가? 김종후는 …… “100년이 지나도록 명나라를 생각하는 것이 인정이나 천리에 비추어 불가능하다”는 홍대용의 주장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 그러나 명나라에 대해서라면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명나라를 잊을 수 없는 것은 명조明朝 이후에 ‘중국’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이 ‘명조’를 생각하지 않는 것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중국’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책망하는 것”이다(419쪽).

“만주족이 치발에 오랑캐 복장[左袵]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점거하고 있는 땅은 삼대 이래 한나라ㆍ당나라ㆍ송나라ㆍ명나라의 함하凾夏이며, 그 땅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유민이다. 법과 제도가 훌륭하다면 오랑캐에게도 배워야 할 텐데, 하물며 중국의 옛 법을 배우지 않을 수 있는가?” 북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대목은 박제가가 〈존주론〉에서 강조한 논점과 정확하게 일치한다(443쪽).

‘중국’과 ‘외국’, ‘중화’의 언어와 ‘방언’을 각각 이항대립의 양편에 배치하고 개념들로 구분했다는 점에서, 그(홍희준)는 방언을 방언으로 만드는 중심, 즉 ‘중화’의 우월성과 중원 대륙이 가지는 선험적 중심성을 긍정했다. 그가 보는 ‘중국’ 혹은 ‘중화’의 맞은편에는 늘 ‘외국’이 있다. …… 중원 대륙이 청나라의 지배하에 놓인다 해서 그 구조가 바뀌지는 않는다. 이 경우 청나라는 중원의 주인이 된 ‘외국’일 뿐이며, 청나라가 쓰는 만주어는 결코 ‘중화’의 자字가 될 수는 없다(478쪽).

이항로의 방식으로 말한다면 서양이 “이적 중의 이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청나라가 남긴 ‘치발’과 ‘좌임’의 문화가 ‘서양’의 해독이 상징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할 수는 없다. 어느 경우든 대륙에서 ‘중화’가 오염되었거나 사라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문일의 입장에서 보면, 청나라가 끼친 해악의 크기는 ‘서양’이 끼친 악영향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치발과 좌임이 변수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서양’에 비해 훨씬 작은 변수일 뿐인 것이다(502쪽).

반란군 지휘부는 조선 왕조에 대해서는 반체제적이었지만, 유학적 소양을 반드시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홍경래는 봉기 후 태천의 오천사鰲川祠에서 선우협에게 제사를 올리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 선우협은 학문과 덕행으로 명성이 높아 ‘관서 부자’로 여겨지던 인물이었다(546쪽).

서양을 ‘양적’이라 부르는 것이 전통적인 화이론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그에 비한다면, 철종과 조두순이 청나라를 아무렇지 않은 듯 ‘중국’이라고 부르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물론 …… 청나라를 그렇게 부른다고 해서 ‘중화’와 ‘이적’의 이항대립 구조와 그 위에 세워진 온갖 구조물들이 곧바로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학’을 주장했던 박지원이 청나라를 ‘중국’이라 부르지 않았으며, 청나라의 ‘이’다움을 긍정했던 홍희준조차 청나라를 ‘중국’이라 부르지 않았던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 의미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549쪽).

‘중국’의 의미가 변화되어 가는 19세기 말을 전후하여 ‘중화’를 발화하는 방식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 고종과 독립협회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던 1898년 가을, 최익현은 의정부 찬정에 임명되었다. 그는 개화파와 독립협회에 반대하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담아 사직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의 12번째 항목에서 그가 이렇게 말했다. “중화와 이적의 구분을 엄격히 하여 대방大防을 확립하소서.”(562쪽)

대한제국이 탄생하기 한 달 전인 1897년(고종 34) 9월 5일, 이수병李秀丙 등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 이수병의 시야에서 보면, 조선은 땅이 좁다고는 하지만 만승지국萬乘之國이 될 만하고, 고종의 덕과 성취는 충분히 “대명의 통서統緖를 계승”할 만하다. …… “삼가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만동萬東의 뜻을 깊이 체득하고 중흥의 뜻을 크게 발휘하여 속히 황제의 자리를 바르게 하고 속히 명을 내리시어 천명을 따르고 민심에 순응하심으로써, 명나라의 계통을 이어서 영원히 끝없는 복을 누리셔야 할 것입니다.”(569쪽)

한국사에서 번역어가 범람하던 20세기 초는 ‘중화’의 의미장에 소멸의 징후가 확인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황성신문》이 ‘중국’을 ‘지나’라 부르거나, ‘지나’ 혹은 ‘청국’의 중심적 지위를 부정한 것이 눈에 띈다(571쪽).

황현黃玹은 자신이 ‘중화’와 ‘이적’의 구분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양영학교기養英學校記〉라는 글에서 그가 이렇게 말했다. “ …… 천하에 중화와 이적의 구별이 없어졌는데, 어찌 왕도와 패도를 구별할 수 있겠는가. 옛날 서융西戎이나 형만荊蠻 같은 오랑캐와 비교해 보면, 지금 바다 밖 여러 나라들은 ‘이적’이라 할 것도 없다. …… 함께 마주 앉아 도의를 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나라는 그대로 망하게 둘 수 없고 백성은 이대로 죽게 할 수 없다. …… 저들의 부강함을 본받아야 한다. 부강해지려면 저들의 학문을 배워야 한다.”(576쪽)

대한제국 이전까지 ‘동국’은 한반도에 명멸했던 전근대 왕조를 부르던 대명사였으며, 그것은 늘 ‘중국’을 중심에 둔 상태에서의 ‘동쪽 나라’라는 의미를 내포했다. 그러나 신채호에게 ‘동국’은 ‘조정’과 분리된 상태의 ‘국가’를 가리키는 단어일 뿐이다. 이 나라는 이제 ‘중국’에 대한 ‘동국’이 아니라 ‘동양’에 있는 아국我國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동국’을 ‘중화’와의 연관 속에서 정의할 필요는 없다(579쪽).

《황성신문》은 ‘동양’ 세 나라를 예로 들었다. …… 청국은 …… 스스로를 ‘대국’이나 ‘중화’라 하고 외국을 ‘이적’이나 ‘금수’라 부른다. …… ‘아국’의 사정은 더더욱 문제다. 언제나 청국을 본받고 외국을 오랑캐라 하며, 본국은 ‘소중화’라 한다. 학문은 한나라ㆍ당나라ㆍ송나라 명나라를 최고로 여기고, 가렴주구도 청국에 뒤지지 않는다. …… 백성을 개명시키거나 외국의 사정을 파악하거나 국가를 보존할 계책은 없다(586쪽).



출판사 서평

중심과 주변의 의제로 중화를 읽어 내다
고대 이래로 중국인들은 중화와 이적을 이항 대립의 양편에 두었다. 중화는 근대 중국에서 새롭게 정의되었고 또 신조어와 결합함으로써 새 생명을 얻었다. 그러나 지은이가 탐색하려 한 것은 중국인들이 중화를 어떻게 정의했는지가 아니다. 중화와 다른 단어들이 교직하여 구성한 의미장이며, 그것들이 다른 시기 다른 사회집단에 의해 해체되어 가는 양상을 살폈다.
한국사에서 중화가 언제나 이적의 반어의였던 것은 아니다. 더 많은 경우 중화는 중심과 주변에 관한 의제로 여겨졌다. 최치원은 신라인의 정체성을 이夷에서 발견하고 불교를 끌어와 신라문화를 정당화했다. 몽골 복속기의 이색은 중화를 다만 변원邊遠의 반의어로 여겼을 뿐이다. 그러나 고려가 명나라에 사대하면서 상황은 복잡해졌다. 정도전과 그의 추종자들은 중화를 명나라ㆍ정학ㆍ유교ㆍ도통ㆍ정통ㆍ천리와, 이적을 이단ㆍ사설ㆍ불교와 같이 사용했다. 중화를 문명의 기준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중화는 조선이 사대해야 할 대상이자, 조선이 동국이 되는 이유이며, 또 조선이 채워나가야 할 배움의 내용이 되었다.
《맹자》에 등장하는 외천사대畏天事大라는 말은 소국이 대국에 사대하는 것을 합리화하려는 이들에 의해 일찍부터 활용되었지만, 조선은 이제 그 대국이 한족 왕조인지 아닌지 따져 묻기 시작했다.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최명길과 그 비판자들이 주고받은 논쟁은 문제의 소재를 잘 보여준다. 송시열과 그의 학문적 후예들은 의리를 천리와 인륜을 따르는 것이자, 도학을 지키고 이단을 배척하는 의제로 여겼다. 이익과 안정복 등 남인은 고려가 몽골에 대해 가진 군신의 분의分義를 인정했지만, 그런 그들 역시 그 의리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었다. 그 의리의 기저에 중화가 있었다.
사대와 분의를 둘러싼 논쟁은 조선에서 화華에 비춘 동東의 자리에 대한 고민을 심화시켰다. 조선을 대중화로 상상하거나, 조선이 천자의 의례를 시행할 수 있다고 주장이 돌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의 발화자들에게 조선은 중국을 중국이게 하는 이유를 가진 나라이며, 중국으로 대우받을 수 있는 문물을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는 나라이지만, 결코 중국은 아니었다. 그들은 정통正統의 기준을 동東에 적용하여 화華의 기준에서 동東을 합리화하거나, 화華와 동東이 함께 구성하는 역사를 보여주려 했다.
문명의 기준을 충족시키려 했던 조선의 발화자들에게 안정기에 접어든 청나라는 더는 외면하기 어려운 고민거리였다. 김창협, 성대중, 이덕무, 홍양호 등은 모두 황명사대부들의 후예에 관심을 가진 존명 의리의 신봉자였다. 홍대용, 박제가, 박지원 등은 청나라로부터 배우려 했다. 물론 그들은 중화와 존주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자부심에 기대는 존주가 아니라, 조선의 낙후함을 인정하고 중국을 내면화하는 존주였다. 북학파 박지원에게 중화는 명나라이자 중국이며, 깨진 기왓장으로 상징되는 문명이었다. 청나라의 오랑캐다움을 전면적으로 긍정했다는 점에서 홍희준은 특별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중화를 문명의 기준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다.

전근대와 근대를 넘나들다
화華가 이夷와 짝하는 단어가 된 이후 사대, 동국, 북학을 둘러싸고 적지 않은 논쟁이 있었다. 참여자들은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중화의 의미장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변경의 발화자들은 조선 유교 문화의 중앙에 있었던 그들과는 결이 달랐다. 평안도 태천 출신의 박문일도, 정주 출신의 백경해도 기자와 소중화를 말했지만, 그들은 그 단어들로 평안도의 문화적 정체성을 옹호하려 했다. 홍경래 난에서 격문을 작성했던 김창시도 중앙의 발화자들이 중화의 의미장 안에서 사용했던 단어들을 구사했지만, 그가 그 단어들로 정당화한 것은 중화가 아니라 진인眞人이 이끄는 봉기의 정당성이었다.
개항 이후 자본주의 세계질서에 편입된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이들도 중화의 의미장에 균열을 내는 데 동참했다. 김윤식은 북학이라는 단어를 구사하고 또 사대를 말했지만, 그 의미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그에게 청나라는 배움의 대상 그 자체였으며, 사대를 말하는 그의 문제의식 안에 외천사대에 관한 발상은 없었다. 어느새 조선은 중국이라는 단어에서 문명적 의의를 떠올리지도 않게 되었다. 중국은 마침내 조약 체제하의 대청국을 의미하는 단어가 되어 갔다. 그즈음 중화의 의미장에도 균열이 선명해졌다. 최익현은 조선이 ‘황통’을 계승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수병은 “제통을 이어 천자국이 된 제후국”을 상상했다. 마침내 ‘중화’를 폐기하고 그 의미장에서 쓰이던 단어들로 새롭게 발견한 대체재를 합리화하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그렇게 중화는 근대 한국의 담론 지형에서 소멸했다.

계몽의 욕망을 넘어 역사의 복잡성과 중층성을 드러내다
역사와 현실에 대한 지은이의 문제의식도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지은이는 책머리에서 근ㆍ현대를 포함한 모든 후행 시기를 특권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했다. 또 과거를 수단시하거나 과거로 현재나 미래를 정당화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결코 역사와 현재의 관계를 단절적으로 보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시대착오ㆍ목적론ㆍ이분법을 넘어서겠다는 말이며, 계몽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는 뜻이다.
지은이가 주목한 것은 그 시대의 문법, 그 문법을 구성하는 변수들, 그리고 그 시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절실함과 심성이다. 현재는 미래의 과거이지만, 그 결과를 예단할 수 없다. 반면 역사는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지나간 현실이지만, 우리가 그 결과를 알고 있으니 복기해 볼 수 있다. 그렇게 우리가 지나간 현실을 되짚어 보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미래의 과거가 될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 자신을 더 잘 알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된다. 그것이 행간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지은이의 생각이다.
지은이가 이론과 방법론을 제한적으로만 활용하려 하는 장면도 눈에 띈다. 지은이는 이 책이 독일의 개념사, 영미권의 지성사를 참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은이에게 이론이나 방법론이란 역사적 현실을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는 선에서만 의의를 지닌다. 지은이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인간의 삶과 그 시대가 낳은 복잡성과 중층성을 온전히 그려내는 일이다. 이 책 곳곳에서 묘사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맥락과 질문을 중요하게 여기는 역사 글쓰기와 만나다
지은이는 중화로 사대주의나 선비정신을 분석하려 하지는 않는다. 중화를 내면화했거나 중화의 의미장에 생채기를 냈던 역사상의 발화자들에게 말할 수 있게 할 뿐이다. 지은이가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런 면모가 확인된다. 지은이는 600쪽이 넘는 이 책의 본문에서 시종일관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다만 발화자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발화자의 말이 모두 끝난 뒤 그의 의도를 설명하고 맥락을 해설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텍스트에 기대되 텍스트를 억압하지 않는” 지은이의 방식이다. 이 책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따옴표는 사료의 언어를 자신의 언어와 구별해 내려는 지은이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일반적인 역사서와는 달리, 지은이는 확신에 찬 결론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찾은 답을 유일한 정답이라 주장하지도 않지만, 정답으로 여겨질 만한 것을 애써 강조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가설을 세우거나 그 가설의 타당성을 논증하는 데도 큰 관심은 없다. 맥락을 존중하고 다르게 질문하기. 그것이야말로 정작 지은이가 전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다. 결론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무엇을 질문하고 어떻게 독해해서 도달한 결론인지 성찰하는 일이 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거기에 사대주의와 선비정신을 넘어 역사학적 통찰력으로 이르는 길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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